한강뷰
제6화 투명한 벽 너머
금요일.
해가 뜨기 전부터 박진수는 잠을 설쳤다.
자꾸만 메일 제목이 떠올랐다.
‘구조조정 면담 안내’
‘금요일 오후 2시’
시계를 보니 오전 5시 40분이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출근길 지하철.
이어폰 너머로 코털아저씨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민 여러분!
지금의 싸움은 단순한 선거가 아닙니다!
투기 자본, 외국계 펀드가 이 나라 기업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래. 우리 회사도 똑같아.”
주먹을 쥔 채 박진수는 이를 악물었다.
오전 시간은 비현실처럼 흘러갔다.
메일 확인도, 보고서 작성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12시가 넘어가자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가려던 순간, 인사팀 박주임과 또 마주쳤다.
이번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 순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진수는 사장 면담 신청서를 작성해 올렸다.
[내용 : 구조조정 면담과 관련하여 사장님과 직접 면담 요청합니다.]
보내는 버튼을 누른 뒤 심호흡을 깊게 했다.
‘난 그냥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어.’
오후 1시 55분.
인사팀 회의실 문 앞에 도착했다.
손이 식은 채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사장 이민정—사내에선 모두 ‘이변’이라 부르는 인물—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표정은 차분했다.
박진수가 자리에 앉자 이민정은 서류 한 장을 펼쳤다.
“박진수 차장님. 오늘 면담 사유는 이미 전달받으셨을 겁니다.”
“네.”
“당사의 현재 경영상황과 LJM 파트너스 측의 경영 효율화 지침에 따라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텍스트를 읽는 듯했다.
박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경영관리팀에서 핵심 파트너사 관리 업무를 맡아왔습니다. 그동안 성과도 인정받았고요.”
이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조정은 성과나 개인 역량과 무관하게 전반적인 비용 구조 최적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동안 팀원들과 파트너사 관리 최선을 다했는데….”
“AI 기반 관리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일부 관리 인력의 중복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인적 자원 유지보다 시스템 전환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입니다.”
박진수는 목에 핏대가 올랐다.
“그러니까 제 정치 성향이나 노조 활동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이민정은 처음으로 박진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는 무관합니다. 구조조정 대상은 시스템 최적화 기준에 따라 선정되었습니다.”
말투는 건조했고, 더 이상 감정의 틈을 주지 않았다.
박진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추후 절차에 대해서는 인사팀에서 상세 안내 드릴 예정입니다.”
면담은 거기서 끝났다.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복도 끝까지 걷는 동안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건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박진수는 다시 민주당 시민운동 카톡방에 접속했다.
분노와 허탈함이 뒤섞여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외국계 PEF 자본 때문에 제가 구조조정 대상이 됐습니다.
여러분, 이런 현실을 우리가 외면하면 안 됩니다!”
몇 초 뒤 댓글이 달렸다.
“형님… 좀 쉬시는 게 좋을 듯해요.”
“요즘 형님 너무 예민해 보여요.”
“리버바이성동 뷰 좋은 집 사셨으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요.”
박진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왜 이래…? 우리가 같이 싸운다고 했잖아.”
속이 뒤틀렸다.
볼륨을 최대로 높여 코털아저씨의 영상을 틀었다.
“지금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싸워야 합니다! 투명한 벽 너머에서 웃고 있는 그들을 향해!”
이어폰을 꽉 눌러 귀에 끼웠다.
‘그래. 싸워야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아.”
“그냥… 별일 아니야.”
“여보, 이제 그만 좀 버텨. 천장 물도 더 심해졌어. 오늘 낮에 관리사무소 직원이 왔는데 아마 외벽 문제일 가능성이 크대.”
박진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호들갑 떨지 마. 내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호들갑? 지금 천장에서 물 뚝뚝 떨어지는데 이게 호들갑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 요즘 이상해. 커뮤니티에 하루종일 글 올리고 유튜브만 보고… 회사도 그렇고, 이 집도 그렇고 당신만 아니라고 하잖아.”
박진수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 후에야 겨우 내뱉었다.
“나는 지금 이겨내고 있는 거야.
다 버티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설득력 없게 들렸다.
소파에 앉아 박진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자국은 더 번졌고, 한쪽 벽지마저 살짝 들떠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코털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바르게 돌려놓겠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반드시!”
그러나 그 목소리도 이제는 마치 투명한 벽 너머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박진수는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텅 빈 거실에 혼자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