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뷰 – 제7화

한강뷰 제7화 탈출하는 자 구조조정 면담 후 며칠이 지났지만, 박진수는 여전히 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코털아저씨의 방송도 예전처럼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한참 듣다가 도중에 꺼버리곤 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달라졌다. 동료들은 박진수에게 말을 걸 때 조심스러워졌다. 회의 시간에도 예전처럼 의견을 활발하게 내지 못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박대리조차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마치 유령 취급을 당하는 것 같군.’ 그 생각이 마음 한켠을 아프게 찔렀다. 그런 그에게 모처럼 연락이 온 것은 동기 이상훈이었다. “오늘 저녁에 한잔 어때? 나 할 얘기 좀 있어.” 반가운 마음에 박진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상훈. 회사 동기 중에서도 그가 가장 부러워했던 인물이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운 좋게 송파구 모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그때부터 ‘신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뒤 오랜 기간 별다른 투자 없이 묵묵히 보유하다가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서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나도 너처럼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 박진수가 술자리에서 종종 내뱉던 말이었다. 그 이상훈이 뜬금없이 먼저 술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저녁, 을지로의 작은 주점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초반엔 별다른 얘기 없이 일상적인 잡담만 오갔다. 그러다 소주 한 병이 비워질 즈음, 이상훈이 슬쩍 입을 열었다. “나 송파 아파트 팔았어.” 박진수는 술잔을 든 채 손을 멈췄다. “팔았다고? 송파 아파트를?” “응. 지난주에. 25억에 매매계약 했어.” 그 말에 박진수의 속이 울컥했다. “25억이나 받았다고?” 이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말레이시아 MM2H 은퇴비자 준비하고 있어. 쿠알라룸푸르에 콘도 하나 계약했고, 미국 배당주 15억 정도 넣어두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박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엔 과거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상훈의 청약 당첨 소식이 사무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날. 그때 모두가 그를 부러워하며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나는 12년을 악착같이 모아서 겨우 리버바이성동 한 채 샀는데…’ 잔을 비우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대단하다. 나는 감히 그런 결정 못 해.” 이상훈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도 고민 많이 했어. 근데 애가 커가는데, 교육 문제도 그렇고… 솔직히 여기서는 답이 안 보여서.” 그 말이 박진수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문득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도 고민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이제서야 뚜렷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애가 크면 국제학교 문제, 교육비, 삶의 질. 말레이시아로 간다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들. 그러나 박진수는 애써 허세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직은 그런 생각 없어. 리버바이성동 한강뷰에서 살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잖아. 강남3구야 못 미쳐도, 뷰는 내가 앞서지. 이 창 너머 한강은 적어도 내 거니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이상훈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너무 버티지 말고, 가족 생각도 좀 해봐.” 그 말에 박진수는 대꾸하지 못했다. 술잔만 연거푸 비웠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오늘 상훈 씨 만났다며?” “응.” “들었어. 그 집 팔고 말레이시아 간다던데.” 박진수는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각자 사정이 있으니까.”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한번 고민해보는 게 어때? 국제학교 문제도 있고… 솔직히 여기 이렇게 계속 사는 것도 부담스럽고.” 박진수는 움찔했지만 곧 허세 섞인 말로 눌렀다. “우린 이제 대한민국 1%야. 리버바이성동 살잖아. 그 정도 자부심은 있어야지.”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실 천장 모서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물자국이 더 짙어져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그 자부심이 우리 애한테 도움이 되진 않아. 당신, 요즘 자신한테도 거짓말하는 것 같아.” 박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에 반박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스마트폰을 켜서 민주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우리는 투기 세력과 자본의 농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바르게 돌려놓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글을 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리는 손끝은 자꾸만 흔들렸다. 천장 쪽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한강뷰 – 에필로그

한강뷰 에필로그 – 어느 날의 한강변 새벽 공기가 싸늘했다. 박진수는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봤다. 네 시 반. 가방 속에는 아직 배달 건 하나가 남아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무게였다. 몸도, 마음도. 리버바이성동으로 돌아가는 길. 배달을 마친 뒤였다. 관리사무소 우편함에 꽂힌 통지서를 봤다. [임의경매 낙찰자 선정 완료 / 점유자 퇴거 요청 예정 안내] 봉투는 뜯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법원에서 낙찰 결과를 확인한 지 며칠이 지났다. 퇴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아직 버티고 있었다. 팔 것도, 갚을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냥 버티고 있었다. 쿠팡 배달로 벌어들이는 돈은 생활비로 빠듯했다. 대출 이자 연체는 이미 불어날 만큼 불어났다. 아내에게는 여전히 연락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와 딸의 근황도 거의 모른다. 그게 더 편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없었다. 그날 새벽, 잠시 한강변 난간에 기대섰다. 손끝이 저려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이상훈. 피드에 새 게시물이 떠 있었다. [아이 첫 국제학교 등교 / KL 새 집에서] 아이의 작은 교복 차림 사진, 쿠알라룸푸르 고층 콘도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파란 하늘. 밝게 웃는 아내의 얼굴도 담겨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잠시 멈췄다. 그런데도, 스크롤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문득 카톡 알림이 떴다. 회사 동료가 보낸 코인바닥 커뮤니티 기사 캡쳐였다. [조한결 a.k.a 그믐달, 두바이 블록체인 VC 행사에서 단독 인터뷰] 사진 속 조한결은 고급 양복 차림으로 투자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짧은 인터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리스크는 늘 있지만, 지금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박진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자유. 그 단어가 다시 목에 걸렸다. 스마트폰 화면을 꺼버렸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는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퇴사하고 배달을 시작하면서 가끔, 아주 가끔 피웠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성냥불을 붙이며 손끝이 약하게 떨렸다. 담배 연기가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리버바이성동 건물이 저 멀리 어스름 속에 보였다. 이제 그곳도 곧 비워야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박진수는 담배를 길게 빨았다. 입술 끝에 쓴맛이 남았다. “나는… 남았다.”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저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믿어야만 했다. 담배가 다 타들어갔다. 그는 꽁초를 난간 옆 재떨이에 눌러 껐다. 한참을 더 서 있다가 가방을 다시 메었다. 스마트폰을 켰다. 새 배달 알림이 떠 있었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새벽은 여전히 차가웠고, 길은 아직 길었다.

한강뷰 – 제15화

한강뷰 제15화 나는 남았다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쌓인 고지서 봉투들이 탁자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박진수는 어느 것 하나 손을 대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다. 그중 가장 두꺼운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OO은행 주택담보대출 연체 고지서]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를 찢는 손끝이 떨렸다. 안쪽에는 깔끔하게 인쇄된 연체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귀하의 대출금 상환이 일정 기간 연체되었습니다. 계속 연체 시 법적 조치(임의경매 포함)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서늘한 문장이 눈에 박혔다. 한동안 눈앞이 흐릿해졌다. 며칠 동안 그는 모든 걸 미룬 채 배달만 반복했다. 앱을 켜고, 가방을 메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리버바이성동 집에는 점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그곳에 들어서면 숨이 막혔다. 천장에 맺힌 물자국, 바닥에 눅눅하게 퍼진 냄새, 텅 빈 거실. 모두가 그를 죄어왔다. 그러나 팔 수는 없었다. 팔아도 남는 게 없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기 싫었다. 연체를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배달을 돌며 손에 쥐는 몇 만 원으로는, 이 고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내심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욱 숨 막혔다. 이제는 아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와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오롯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전쟁이었다. 아무도 대신 싸워줄 수 없는 싸움. 그렇게 믿으려 애썼다. 그러나 연체는 멈추지 않았다. 하루는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유니폼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우편함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다녀간 듯했다. 그 안에 두툼한 등기 서류가 꽂혀 있었다. 박진수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것을 꺼냈다. [OO지방법원 임의경매 개시 결정 통지서]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가누기 힘든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열었다. “본건 부동산에 대하여 임의경매 개시 결정을 하였으니, 이에 따라 집행 절차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법원의 문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박진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나는… 이제 점유자에 불과한 건가.’ 문득 그 사실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한때 당당하게 외치던 “내 집” 은 이제 경매 절차에 들어간 ‘채무자의 점유재산’ 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실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잠시 후, 스마트폰이 울렸다. 새 배달 알림이었다. 가방을 다시 메야 했다. 그는 유니폼을 주섬주섬 입었다. 축축한 땀냄새가 다시 코끝을 찔렀다. 거울을 스쳐 보았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깊게 패여 있었다. ‘나는… 남았다.’ 조한결은 두바이로 갔고, 이상훈은 쿠알라룸푸르로 떠났다. 그들은 자유를 택했다. 자신은 이곳에 남아 쿠팡 유니폼을 입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차이가 뼈에 사무쳤다. 배달 가방을 메고 다시 새벽 길에 나섰다. 한강변을 지날 때, 리버바이성동의 건물들이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곳 불빛 하나하나가 더 멀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 집은 아직 내 집이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새벽 배달을 마치고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한가운데, 탁자 위에 펼쳐진 임의경매 통지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박진수는 천천히 다가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주저앉았다. 손끝으로 종이 끝을 쓸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남았다.’ 그 말만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는 알 수 없었다.

한강뷰 – 제14화

한강뷰 제14화 그들은 떠났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다리는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린 끝에 후들거렸고, 팔과 어깨는 저릿하게 뻐근했다. 유니폼 안은 땀으로 절어 있었다. 셔츠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팔을 들 때마다 축축하고 짭짤한 땀냄새가 코를 찔렀다. 쿠팡 유니폼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비린듯한 땀내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알림창이 떴다. [공지] 조한결 사원 퇴사 송별회 일정 안내 박진수는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송별회…?’ 자신은 이미 회사에서 퇴사한 몸이었다. 그렇지만 팀 단톡방은 나가지 않고 그냥 둔 상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두었던 것이, 이제 와서는 더 괴롭게 다가왔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평소 친했던 팀원 한 명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야, 한결 왜 퇴사했대?” 곧 답장이 왔다. “몰라. 개인사정이라고만 하고 말 안 하더라. 며칠 전부터 인수인계 하더니 조용히 나갔어.” 박진수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본 채 숨을 내쉬었다. 그믐달. 며칠 전 술자리에서 힐끗 본 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지. 자유… 뭐, 그런 거겠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자유라는 말이 유난히 속을 쓰리게 했다. 잠시 뒤, 개인 카톡 알림이 떴다. [조한결] 형, 저 사실 두바이로 갑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조만간 꼭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어요. 카톡 창이 밝게 빛났다. 박진수는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답장창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지금 쿠팡 알바를 뛰고 있는데…. 그 문장만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결국 스마트폰을 내려두었다. 가슴 한켠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새벽 공기가 창문 너머로 스며들었다. 몸은 아직 식지 않은 채 축축했다. 땀이 식을 틈도 없이 다시 유니폼을 주섬주섬 챙겼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다시 입으려니 온몸이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앱에서 새로 할당된 배달지를 확인했다. 한강변 인근 지역. 가방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피곤으로 감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계단을 오르고,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며 땀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한참 뒤, 첫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진수는 한강변 난간에 멈춰 섰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숨을 골랐다. 저 멀리 리버바이성동의 건물들이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들. 이른 아침 출근길로 바삐 움직이는 세상. 손에 쥔 배달 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상훈의 인스타그램 화면. 조한결이 보낸 카톡. 팀원에게서 들은 전언. 손끝이 화면을 가만히 쓸었다. 눈앞의 강물은 고요했지만 마음속은 뒤틀리고 있었다.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가방을 다시 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한강뷰 – 제13화

한강뷰 제13화 쿠팡 유니폼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우저 화면에는 고용노동부 사이트가 떠 있었다. 실업급여 신청 페이지.이미 몇 번을 들락날락했지만 신청 버튼은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을 떨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 한숨을 삼켰다. 클릭. 신청이 완료됐다는 알림창이 떴다. 박진수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래. 잘한 거야.’ 그러나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계좌를 확인했다.실업급여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동안은 어떻게 버텨야 할까.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둔 지출 목록을 꺼냈다.수입은 없는 상태.남아 있는 잔고는 빠듯했다. 중고거래로 판 물품들도 한계에 다다랐다.팔 수 있는 건 이미 거의 팔았다. 삼성전자 주식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쉽게 손을 대기도 망설여졌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한쪽에 켜둔 광고였다. “쿠팡플렉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박진수는 화면을 클릭했다. 며칠 뒤.쿠팡플렉스 앱을 깔고 가입을 마친 뒤 첫 배달 일정을 잡았다. 마트에서 장 본 물건들을 동네 곳곳으로 배달하는 일. 생각보다 준비물이 많았다.유니폼도 지급받아야 했다. 박진수는 지정된 센터에 들러 유니폼과 장갑, 배송용 카트를 받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유니폼 셔츠를 입고 캡 모자를 쓴 얼굴.어딘가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스스로에게조차 낯선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첫 배달날.배송 앱에서 배정된 물량을 확인했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 다른 손에는 카트 핸들을 쥐고 출발했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빌라가 많았다.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렸다. 박스를 들고 오를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식은땀이 등에 밴 채로 겨우 배달을 마쳤다. 휴게 시간.앉아 있던 벤치에서 숨을 고르며 스마트폰을 켰다. 민주당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러나 더는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이 올린 글을 멍하니 내려볼 뿐이었다. 손끝이 멈췄다. 한참 동안 화면을 내려보다 스마트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하루가 끝났다. 박진수는 리버바이성동 현관문을 열었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들어왔다. 거실은 여전히 싸늘했다. 천장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내와 딸이 없는 집은 유독 더 공허했다. 그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바닥에 쳐박힌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눈을 감았다. 며칠 뒤. 배달 건수를 조금씩 늘렸다.익숙해질수록 몸은 더 고단해졌다. 가족과의 연락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내에게서 오는 문자에는 답장이 늦어졌다.전화는 피하게 됐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쿠팡 유니폼을 입고 일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 잘 지내고 있다’는 짧은 답장만 보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택배 상자를 들고 한강변 근처 고급 아파트 단지에 들른 날.유난히 반짝이는 로비를 지나며 속이 쓰렸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유니폼 차림의 자신이 낯설고 초라해 보였다. 손에 든 택배 박스가 유난히 무거웠다. 배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잠시 멈춰 섰다. 저 멀리 강 건너 리버바이성동이 보였다. ‘나는 저기 사는데….’ 가슴 한켠이 뻐근했다. 그때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새 배달 건 알림. 박진수는 모자를 고쳐 썼다. ‘계속해야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강뷰 – 제12화

한강뷰 제12화 절벽 위의 집 텅 빈 거실. 조용한 공간에 물방울 소리만 맺혀 있었다. 뚝.뚝. 천장 한쪽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바닥의 천으로 깔아둔 수건을 적시고 있었다. 박진수는 물든 수건을 걷어내며 중얼거렸다. “다 뜯어야 한다고?” 관리사무소는 이미 천장을 일부 철거해야 한다고 통보해왔다. 윗집에서는 아니라고 했다. 전주인에게도 다시 연락을 해봤지만 돌아온 건 뻔한 대답이었다. “전 임차인 아저씨는 그런 말 없었는데?” “네, 없었어요. 하자 책임은 인수인계 시점으로 끝나는 거는 혹시 아시죠?” 피식거리던 전주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박진수는 이를 악물었다. ‘소송이든 뭐든, 다 해야지.’ 그러나 현실은 간단하지 않았다. 거실 천장을 뜯는 순간 당장 거주할 곳부터 구해야 했다. 대체할 임시 거처, 비용, 복잡한 공사 일정. ‘그 돈은 또 어디서 마련하나.’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집을 내 손으로 고치지도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꼴은 더더욱 싫었다. 대출 상환 고지서가 도착했다. 박진수는 종이를 펼쳐 들었다. 고지서 한쪽 면에는 향후 30년간 빼곡히 이어질 상환 금액 일정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매달 350만 원. 그리고 이어지는 줄줄이 금액들. 손끝이 차가워졌다. ‘앞으로 30년…’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계좌를 확인했다. 잔고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나마 보유하던 삼성전자 주식도 일부 매도했다. 매도 확인 알림이 화면에 떴다. 그 알림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팔 게 또 뭐가 있지.’ 안방 장롱을 열었다. 아내가 남기고 간 몇몇 물건들. 그중엔 아이의 작은 장난감 박스도 있었다. 손끝으로 박스를 쓸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피아노 학원비… 수영 강습비….’ 이미 몇 주 전부터 자동이체는 중단되어 있었다. 문자 알림이 여러 번 온 뒤였다. ‘못 낼 건 또 뭐가 있나.’ 계좌 이체 메뉴를 열었다. 손이 떨렸다. 아이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며칠 더 미루려던 마음을 접었다. ‘이거라도 먼저 내자.’ 액수를 입력하고 송금 버튼을 눌렀다. 알림음이 울렸다. ‘그래. 일주일 늦었지만 그래도 됐다.’ 그러나 묘한 씁쓸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민주당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헤맸다. 글을 쓰려다 멈췄다. 지난번에 올린 글에는 댓글 하나 달려 있었다. “형님… 이제 가족 생각하세요.” 의례적인 위로. 그 이상은 없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집은 제 전쟁터입니다. 투기 자본과 싸우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그대로였다. 좋아요는 없었다. 댓글도 없었다. 박진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식탁 위엔 택배 박스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며칠 전 중고거래에 올려둔 커피 머신. 거래가 성사되어 포장까지 마쳤다. 택배 접수 예약 알림이 떴다. 박진수는 박스를 내려다봤다. ‘이제 팔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천장에서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을 감았다. 문득 아내와 딸이 떠올랐다. 처가로 간 아내와 아이가 오히려 고마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이 곰팡이 냄새와 물비린내 가득한 집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너무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한켠에서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안도감이 다시 죄책감으로 번졌다.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괜찮아. 나는 싸우고 있다. 이 집은 내 거야.’ 그러나 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집이… 정말 내 집인가.’ 눈가가 뜨거워졌다. 박진수는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강뷰 – 제11화

한강뷰 제11화 명찰을 떼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국내 전설적 코인 투자자.” “그믐달, 선물거래 수천억 수익 인증.” 짧은 문장들이 눈에 박혔다. 스르르 화면을 끌어내리다가 박진수는 손을 멈췄다. ‘조한결이… 그 그믐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술기운은 이미 가셨지만 속은 여전히 거북했다.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뭐라고 훈계질을….’ 어젯밤 술자리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도 열심히 모으면 언젠가 한강뷰 아파트 살 수 있어.” 그때 조한결이 따라주던 잔. 웃으며 “네, 형.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던 표정. 박진수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삐걱 소리를 냈다. 회사 복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팀장과 마주치지 않으려 일부러 우회로를 골랐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손끝도 무거웠다. 화면을 켜자마자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다. [인사팀 공지] 희망퇴직 지원자 면담 일정 안내 박진수는 메일 제목을 몇 번이고 읽었다. 손끝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내용을 열었다. “금주 내 개별 면담 일정이 잡힐 예정입니다. 대상자는 별도 안내 예정입니다.” 목구멍이 따가워졌다. 옆자리 동료가 휙 고개를 돌렸다가 시선을 피했다. 박진수는 노트북 화면을 덮었다. 복도 끝 인사팀 사무실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사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박 차장님 오셨네요.” 말끝에 미묘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테이블 위엔 희망퇴직 지원서가 놓여 있었다. 박진수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게… 지금 당장 서명해야 하는 겁니까?” 인사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물론 선택은 자유시지만… 현재 구조조정 대상자 중 한 분이신 건 아시죠.” 박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서류를 넘겨보았다. 마지막 페이지. 서명란이 눈에 들어왔다. 펜을 든 손이 떨렸다. “이렇게 쉽게 사람을 내보내는 건가요.” 인사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박진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손끝은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더 버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파고들었다. 회사 건물을 나서는 발걸음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출입게이트에서 명찰을 떼어 손에 쥐었다. 손바닥에 얹힌 명찰이 낯설었다. 한때는 이 명찰을 달고 뿌듯해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명찰을 가방 안에 넣으려다 말고 다시 꺼냈다.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리버바이성동 현관문을 열었다. 텅 빈 집안 공기가 싸늘하게 감돌았다. 현관 한쪽 구석에 아내가 두고 간 여행가방이 그대로 있었다. 식탁 위엔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진수 씨, 나랑 아이는 친정에 있어요. 이 집, 이젠 우리 둘이 살기 어려워요.” 손끝으로 메모를 쓸어내렸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러나 울음은 터지지 않았다. 그저 메모를 구기지 못한 채 손끝에서 내려놓았다. 천장에서 또다시 물방울 소리가 뚝뚝 떨어졌다. 소파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민주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헤맸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끝까지 버팁니다. 이 집은 제 자존심입니다!” 글을 올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반응은 거의 없었다. 댓글 두 개가 달렸다. “형님… 이제 가족 생각하세요.” “형님, 너무 고생 많으세요.” 박진수는 화면을 꺼버렸다. 손끝이 식어갔다. 탁자 위에 놓인 명찰을 바라보았다.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나였나.’ 명찰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천장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나는 싸우고 있다.’ 혼잣말이 허공으로 퍼져갔다.

한강뷰 – 제10화

한강뷰 제10화 그믐달 박진수는 보고서 프린트물을 손에 쥔 채 복도에 서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박진수를 바라보는 김이사의 시선이 등 뒤까지 파고들었다. “이거 다시 해와요. 지금 이게 보고서라고 볼 수 있는 거에요?” 말 끝이 가시처럼 박혔다. 회의실로 들어가는 김이사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박진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눈앞이 흐릿했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형, 오늘 시간 돼요?” 조한결이었다. 같은 팀 후배였다. 입사 2년차, 전주 출신. 서울로 올라와 회사 근처 원룸에서 혼자 살며 매사에 싹싹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평가받던 청년이었다. 입사 초기부터 박진수를 잘 따랐고, 종종 둘이 술 한잔하거나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항상 예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태도는 박진수로서도 흐뭇한 후배였다. 박진수는 한동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유난히 습하고 탁한 공기가 흐르던 작은 포장마차에 둘은 마주 앉았다. 조한결이 술을 따르며 말했다. “형… 요즘 회사 분위기 안 좋잖아요. 괜찮으세요?” 박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은 척하는 거지.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아.” 잔을 비웠다.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나 싶어. 그저 내 정치 성향 밝히고 해야 할 말 하고 살았다 이거뿐인데.” 조한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채웠다. “그래도 형은 그동안 열심히 해오셨잖아요.” 박진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술이 오르면서 말이 풀어졌다. “내가 12년을 모아서 이 집 샀어. 리버바이성동 한강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이제 마용성 한강뷰 사는 사람이야.” 조한결은 조용히 잔을 채웠다. “형, 진짜 대단하세요.” 박진수는 술잔을 들고 중얼거렸다. “근데 요즘엔… 뷰만 보고 산 게 아닌가 싶어. 이제는 천장에서 물 떨어지고, 애는 못 살겠다고 나가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도 버텨야지.” 술기운이 한층 더 오르자 박진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한결아, 너도 알아둬라. 돈은 모아야 돼. 나도 12년 동안 피땀 흘려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도 열심히 모으면 언젠가 한강뷰 아파트 살 수 있어.” 조한결은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며 웃어 보였다. “네, 형. 맞습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잔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박진수는 흐뭇하게 잔을 받았다. “그래, 그게 사람 사는 거야.” 잔을 비웠다. 속으로는 약간의 허전함과 피로가 퍼져갔다. ‘그래…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희미한 불안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잔이 몇 순배 더 돌았다. 조한결이 휴대폰을 꺼내 무심코 화면을 넘겼다. 박진수는 흐릿한 눈으로 그의 화면을 슬쩍 바라보다가 멈췄다. 커뮤니티 화면이었다. 상단에 ‘코인바닥’이라는 로고가 보였다. 그 아래, 닉네임이 잠깐 스쳤다. ‘그믐달’ 박진수는 술기운에 그 이름을 뚜렷하게 기억하진 못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어감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믐달…?’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조한결은 눈치채지 못한 채 화면을 넘겼다. 박진수는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며 잔을 비웠다. 눈을 뜨자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박진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장면이 떠올랐다. ‘그믐달…? 코인바닥?’ 몸을 일으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브라우저를 열고 ‘그믐달 코인바닥’을 검색했다. 곧 엄청난 글들이 쏟아졌다. “국내 전설적 코인 투자자.” “선물거래 수천억 수익 인증.” “추정 자산 2000억 원 예상” 박진수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조한결이… 그 그믐달?’

한강뷰 – 제9화

한강뷰 제9화 스미는 것들 스마트폰에서 꺼지지 않는 물방울 알림음처럼 커뮤니티 새 댓글 알림이 또 떴다. “형님, 가족이 먼저예요…” 박진수는 손끝으로 알림을 밀어냈다. 눈앞엔 천장 가장자리를 타고 번지는 불그스름한 얼룩이 더 또렷했다. 벽 쪽으로 가구를 옮기던 아내가 헝겊으로 벽을 닦아냈다. 손바닥만큼 벽지가 벗겨져 축축한 석고보드가 드러났다. “여보, 더는 못 버텨. 나 애 데리고 나갈게.” 가만히 있던 박진수는 몸을 일으켰다. “누수 원인도 안 밝혀졌는데 우리가 왜 나가야 하는데. 윗집에서 시치미 떼고, 전주인도 딴소리만 하는데.” 벽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던 아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계속 물 떨어지는 거 보고 있을 거야?” “내가 책임자들 다시 찾아가서 확실히 따질 거야. 내가 이 집 산 이유가 뭐야.” “그래. 당신 혼자서 잘 해봐.” 아이를 품에 안은 아내는 가구 옆에 접어놓은 작은 여행가방을 손으로 밀었다. 그 장면이 박진수 눈에 깊이 박혔다. 그가 몸을 돌려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통화 목록을 다시 열었다. 윗집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박진수는 목에 힘을 주었다. “1703호 박진수입니다. 누수 문제로 여러 번 연락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아… 네. 근데 저희 쪽에선 이상 없다고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계속 그런 식으로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지금 우리 집 천장 뜯어야 한다고 관리사무소에서 통보까지 받았는데.” “저희도 기사님 확인하셨잖아요. 저희 배관 문제 없다고.” “그럼 대체 어디서 물이 새는 겁니까. 윗집 아니면 누구 책임이에요?” 상대방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모르겠다니요. 지금 장식장 뒤 벽지가 다 젖어서 떨어지고 있고, 애 방으로도 번지고 있어요.” 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죄송한데요, 저희는 더 확인할 게 없어요. 관리사무소랑 다시 얘기해 보세요.”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박진수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손으로 이번엔 전주인 번호를 눌렀다. 벨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리버바이성동 1703호 박진수입니다.” “아… 또 뭡니까.” “지금 천장 뜯어야 합니다. 관리사무소에서도 원인 못 찾았다고 하는데, 혹시 이 집에 원래 문제 있었던 거 숨긴 거 아닙니까?” 전주는 짧게 웃었다. “웃기시네. 내가 뭘 숨겨요. 우리 땐 멀쩡했다고 했잖아요.” “지금 물이 벽 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신 책임 피할 생각 마세요.” “하, 그건 새로 생긴 문제겠죠. 내가 무슨 초능력자에요?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세요.” 뚝. 통화음이 사라졌다. 바닥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눈에 들어온 건 흐릿한 물자국과 방울져 떨어진 작은 웅덩이.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다. 손으로 물을 한 번 쓸어냈다. 얼마나 지난 뒤였을까. 문득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박진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문틈 너머로 아내가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우리 이사 가자. 아빠가 조금 힘든 거야.” 그 말이 가슴에 깊게 박혔다. 가구 옆으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꺼냈다. 민주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투기 세력과 자본의 농간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글을 올린 뒤 한참을 화면만 바라봤다. 얼룩진 벽과 천장에서 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끝이 마음속에서 끊겼다.

한강뷰 – 제8화

한강뷰 제8화 젖어가는 풍경 비가 내린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창밖으로는 흐릿한 한강이 젖어 있었다. 거실 천장 물자국은 눈에 띄게 번졌다. 박진수는 출근 준비를 하며 슬쩍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일 아니겠지.’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시야는 자꾸 그곳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여보, 오늘 낮에 가구 옮기자. 거실 장식장 뒷벽까지 젖었어.” “장식장? 설마…” 박진수는 허겁지겁 장식장 뒤편을 살폈다. 벽지가 축축하게 젖어 손끝에 차가운 물기가 묻어났다. “이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내는 차갑게 말했다. “계속 방치하더니 이렇게 된 거야. 지금이라도 이사 알아봐야겠어.” “말도 안 돼. 이 집 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당신 고집 피울 때가 아니야.” 말을 잇지 못한 채 박진수는 출근길에 나섰다. 지하철 안. 코털아저씨의 방송이 자동 재생됐다. “국민 여러분, 외국 자본의 탐욕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볼륨을 높이며 박진수는 이어폰을 꽉 눌렀다. 그러나 오늘따라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내가 정말 싸우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생각을 멈추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더 냉랭했다. 박대리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은 슬쩍 피하는 눈치였다. 구조조정 면담 이후 박진수는 회의에서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지나치던 김과장이 뒤돌아보며 동료에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박 차장님, 좀… 무섭지 않아?” 그 말이 고스란히 박진수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였다. 휴게실 구석에서 스마트폰을 켰다. 민주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외국 자본의 탐욕과 싸우는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다급하게 글을 올렸다. 곧 몇 개의 반응이 달렸다. “형님, 요즘 너무 그러시면 건강 해쳐요.” “형님도 리버바이성동에 사시잖아요. 그 자체가 기득권 아닌가요?” “그래도 가족 먼저 챙기셔야죠.” 박진수는 손끝이 떨렸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답글을 달까 망설이다가 그냥 화면을 꺼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현관문을 열자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내일부터 부동산 알아볼 거야.” “뭐?” “이대로는 못 살아. 오늘 장식장 뒷면 썩어가는 거 봤어? 다음은 아이 방으로 번질 거야.” “그럼 우리가 이 집을 버리고 나가자고? 내가 리버바이성동까지 왔는데?” 아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 고집이 우리한테 뭐가 되는데? 당신 커뮤니티에서 정치 글 쓸 시간 있으면 당장 가구라도 옮겨!” 박진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싸우고 있는 거야. 이 상황에서 물러설 수 없어.” “싸운다니? 누구랑 싸우는데? 당신은 지금 우리랑 싸우고 있어.” 그 말에 박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밤늦게 관리사무소에서 온 메일을 확인했다. [1703호 누수 관련 경과 보고] 박진수는 자세히 읽어나갔다. 현재 누수 원인 정확한 파악을 위해 천장 일부 철거가 필요합니다. 윗집 배관 문제는 확인 결과 이상 없음으로 보고됨. 천장 철거 시 추가 비용 및 임시 거주 필요할 수 있음. 손에 쥔 스마트폰이 덜덜 떨렸다. “철거? 대공사? 내 리버바이성동 거실 천장을 뜯어내라고?” 그 생각만으로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사? 임시 거처? 비용은? 내 자존심은?’ 가뜩이나 구조조정 통보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절대 안 돼. 이건 전주인 책임이야. 그리고 윗집도 뭔가 숨기고 있는 거야.’ 박진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윗집 연락처를 다시 확인했다. 며칠 전 관리사무소를 통해 겨우 확보했던 번호였다. ‘이번엔 가만 안 둬.’ 그는 다짐하듯 숫자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울렸다. 한참 동안 신호음만 들려왔다. 거실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스마트폰을 켜서 민주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우리는 투기 세력과 자본의 농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바르게 돌려놓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글을 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리는 손끝은 자꾸만 흔들렸다. 천장 쪽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괜찮아. 나는 싸울 거야.’ 그렇게 되뇌며 박진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두 손은 이미 차갑게 젖어 있었다.

YUZA NOM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