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뷰 제1화 12년의 통장 아버지는 서울시청 9급 공무원이었다. 정년까지 그 일을 했다. 성실했고, 근면했으며, 누구보다 정직했다. 그러나 집은 한 채도 없었다. “진수야, 서울 집값은 너무 올랐다. 곧 떨어질 거야. 그때 사면 돼.” 그 말은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그 말을 들으며 자랐다. 시장으로 가던 길에서도, 명절 친척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일요일 늦은 오후 가족이 거실에 모였을 때도, 그 말은 틈만 나면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저 “또 같은 얘기네” 싶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아버지의 말은 바뀌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겨울날이었다. 종로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쌓이고 있었다. 옆 자리에는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손에는 신문. 경제면 한 귀퉁이를 접어가며 기사를 훑고 있었다. “10년 주기라는 말도 있지 않냐. 기다리면 된다.” 진수는 그 순간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초조했고, 신문을 쥔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기다리다 늙었다. 결국 아버지에겐 집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진수 안에 서늘한 다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나는 반드시 내 집을 산다.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 그 다짐은 대학 시절에도 변하지 않았다. 경제학 개론 수업을 들으며, 주택 시장 흐름을 공부했다. 청약 제도, 대출 규제, 금리 흐름. 그 모든 것이 그의 관심사가 되었다. 동기들이 데이트를 하고, 여행을 준비할 때, 진수는 가계부를 적고, 부동산 카페를 뒤졌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그의 다짐은 더욱 단단해졌다. 봄비가 내리던 첫 월급날. 퇴근 후, 동기들은 술집으로 몰려갔다. “진수야, 첫 월급 받았는데 한잔해야지.” 경영관리팀 선배 최대리가 어깨를 툭 쳤다. 진수는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부모님 뵈러 가야 해서요.” 거짓이었다. 그는 곧장 은행으로 향했다. 비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한 에어컨 바람이 스쳤다. 순서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월급 입금되었습니다.” 그 문구가 온몸에 전율처럼 퍼졌다. 창구 직원이 통장을 건넸다. 그는 통장 안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전투가 되었다. 📉 12년 절약의 기록 커피 한 잔도 사치 택시는 금기 회식은 ‘급한 일’로 회피 매일 가계부 기록 부동산 트렌드 매일 체크 12년이 흘렀다. 8억 원. 그것이 그의 통장에 찍힌 숫자였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리버바이성동. 성동구 한강변. 17억짜리 매물. 사진 속 리버뷰가 그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84㎡ 국평. 거실 통유리 너머로 한남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국평이다. 드디어 우리도 국평이다.” 그는 결심했다. “지금 아니면 평생 못 산다.” 며칠 뒤. 리버바이성동 매매 잔금을 넣었다. 입주 당일. 이삿짐 트럭이 아파트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잔금에 대한 영수증과 열쇠를 손에 쥐었을 때, 손끝이 떨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내 김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출은 괜찮겠지…?” 박진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출은 걱정 말고, 내가 갚아나간다. 나 이래 봬도 홈바이홈 차장이야.”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에 걱정을 담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로 들어서자, 그는 얼어붙은 듯 멈췄다. 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끝으로는 한남대교의 실루엣이 또렷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실 유리창 앞에는 유리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경비아저씨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저기… 유리난간 동의받았답니까? 관리사무소 기록에는 이게 없는데…?” 박진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로잡았다. “아, 그건 제가 설치한 게 아니라 전주인이 설치해 놓은 겁니다. 저도 아직 확인을 못 해서요. 일단 전주인한테 한번 알아볼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경비아저씨 앞에서 전주인에게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물론 진짜로 알아볼 생각은 없었다. 속으로는 흡족한 마음이 퍼졌다. “이게 바로 리버뷰 맛집이지. 괜히 괜한 걸 건드릴 필요는 없지.” 경비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알겠습니다. 다른 입주민 쪽에서 문의가 들어와서요.”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문을 닫고 돌아선 박진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유리난간 너머로 빛나는 강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히려 좋아.” 그때 딸 소연이 뛰어나왔다. “아빠아~~ 여기 진짜 호텔 같아! 나 이 집에서 계속 살래!” 소연은 통유리 앞으로 달려가 두 손을 유리에 척 붙였다. 박진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소연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여기는 우리 집이야. 우리 집! 우리 집이 바로 호텔이야.” 아내 김수진은 조용히 식탁 위에 놓인 잔금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박진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모서리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방울은 금세 흘러내렸다. “입주 청소 때 뭐 제대로 안 닦은 건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입주 청소 업체를 부른 걸 떠올렸다. “그때 분명 청소할 때도 조금 허술해 보이더니… 뭐, 별일 아니겠지.” 박진수는 다시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넘겼다.